대한민국 배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레전드, 장윤창 교수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65세의 젊은 나이에, 위암 투병 끝에 별세하셨다는 소식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그의 삶은 단순히 배구 선수를 넘어,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이자, 후학을 양성한 교육자, 그리고 한국 배구 발전에 헌신한 리더의 모습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오늘은 그의 삶과 업적을 기리는 글을 통해, 그의 숭고한 삶을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 한국 배구의 전성기를 이끈 ‘돌고래’ 장윤창

17세 최연소 국가대표 발탁이라는 경이로운 기록으로 시작된 그의 배구 인생은, 1980년대 한국 남자 배구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인창고 시절부터 빛났던 그의 재능은 세계 선수권 대회 4강 진출이라는 쾌거로 이어졌습니다. 방콕과 뉴델리 아시안게임 금메달, 서울 아시안게임 은메달까지, 그의 발자취는 대한민국 배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특히, 왼손 아포짓 스파이커로서 보여준 그의 플레이는 가히 압도적이었습니다. ‘스카이 서브’라는 혁신적인 기술과 활처럼 휘어지는 허리를 이용한 높은 타점 공격은, ‘돌고래’라는 멋진 별명을 선물했습니다. 그의 경기를 직접 보지 못했지만, 당시 영상이나 기록들을 보면 그의 폭발적인 파워와 섬세한 기술이 얼마나 대단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정말 대단한 선수였습니다.
# 실업 배구의 전설, 고려증권의 핵심 선수

고려증권 시절, 그는 ‘조직력 배구’의 상징이었습니다. 팀의 6회 우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은 그의 헌신과 노력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대통령배 대회 인기 선수상과 MVP 수상 경력은 그의 인기와 실력을 다시 한 번 증명합니다. 단순히 뛰어난 개인기만 보유한 선수가 아니라, 팀의 승리를 위해 헌신하고, 동료들과 호흡하며 최고의 시너지를 만들어낸 선수였기에 가능했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 시절 고려증권의 경기를 보았던 분들은 지금도 그 감동을 잊지 못하실 겁니다. 저 역시 그 영상들을 찾아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 교육자이자 리더로서의 삶

선수 생활 은퇴 후에도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체육학 석사, 한국체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며 끊임없이 자기 계발에 힘썼고, 모교인 경기대학교 교수로서 후학 양성에 헌신했습니다. 대한배구협회 기술이사, 대한민국스포츠국가대표선수회 회장, 한국배구연맹 경기위원 등을 역임하며 한국 배구 발전에 기여한 그의 공로는 실로 지대합니다. 단순히 선수로서의 삶만을 살지 않고, 교육자이자 행정가로서 배구 발전에 끊임없이 기여한 그의 삶은 우리에게 큰 귀감을 줍니다. 그의 헌신과 노력이 오늘날 한국 배구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들인 프로농구 선수 장민국 씨의 활약 또한 그의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여 더욱 감동적입니다.
장윤창 교수님의 서거는 한국 배구계에 큰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의 업적과 정신은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한국 배구의 밝은 미래를 밝혀줄 등불이 될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그가 이룩한 업적과 그의 정신을 기억하며, 한국 배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